［시론］한국 상류층의 비극 〈강준만·전북대교수〉 원로 언론인 손광식씨가 최근에 낸 ‘한국의 이너 서클’이라는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뒷맛이 영 씁쓸하다. 이너 서클 또는 상류층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구경한 탓일까? 한국의 상류층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이 책에 인용된 어느 인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 그 비밀의 한가닥이 숨어 있는 것 같다. “하여튼 권력 돌아가는 건… 어떤 때는 어린 아이들 노는 것 같아”. 과연 그럴까? ‘어떤 때’만 그런 게 아니라 늘 어린 아이들 노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 아이들에겐 공사(公私) 구분이 없다. 나와 친한가 친하지 않은가, 내 말을 잘 듣나 잘 듣지 않나, 나에게 먹을 걸 사주었나 사주지 않았나 하는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한국의 상류층 인사들이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이런 기준 이외에 다른 기준이 있는가? 한국의 상류층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희망적인 건 그들이 ‘오래 고인 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식민통치와 전쟁을 겪으면서 기존의 상류층이 붕괴했기 때문에 벼락치기로 상류층에 편입된 사람들이 많다. 예전보다는 문이 훨씬 더 좁아졌지만, 아직도 한국에선 학벌과 대인관계만 탁월하면 자기 하기에 따라 상류층에 편입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런 가능성과 더불어 상류층 알기를 우습게 아는 평등주의도 한국의 희망이다. 절망적인 건 상류층의 역사와 전통이 없다 보니 그 내부 윤리라는 게 아예 없다는 점이다. 없는 정도가 아니다. 상류층에 편입되기 위한 방법이 사실상의 내부 윤리가 되고 있는데, 그게 영 고상하질 않다. 일종의 ‘전쟁 마인드’라고나 할까? 전시 체제를 살고 있다는 위기의식과 그에 따른 행동 패턴이 상류층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충분한 증거가 제시된 것 중심으로 몇가지 살펴볼까. 첫째, 명예는 없다. 오직 돈이다. 권력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다. 겉으론 뭐라고 떠들 망정 한국 사회가 명예를 존중해주지 않고 돈에 환장한 사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 줄을 잘 서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줄 잘못 섰거나 줄서지 않고 크게 성공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셋째, 끈은 생명이다. 줄을 잘 서기 위한 평소 실력이기도 하다. 혈연·지연·학연의 도움 없이 한국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넷째, 내가 번 돈은 악착같이 내 자식에게 다 물려준다. 사회에 환원하는 건 사회주의 기풍을 조성할 수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다섯째, 내 자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군대에 보내지 말아야 한다. 내 자식은 나를 닮아 특별하므로 더 나은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칙에 좀 과장된 점이 없진 않겠지만, 한국 상류층의 애국심이나 윤리적 수준이 한국 평균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박정희의 18년 체제에 대한 논란은 주로 ‘경제 대 인권’의 구도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가장 심각하게 따져야 할 점이 바로 이게 아닌가 생각한다. 상류층의 세계관과 처세술이 바로 그 시기에 형성되고 고착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정희 개인은 청렴했다는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의 독재는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점이 재조명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5·16 이후 4년간 무려 일곱 차례의 반혁명 유형의 사건을 겪은 박정희는 늘 쿠데타를 두려워하여 군부를 돈과 사조직으로 관리했으며, 고위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보다는 자신에 대한 충성도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국 사회는 지금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 우리가 두렵게 생각해야 할 것은 지금으로선 탈출구가 없다는 점이다.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이 상류층의 기존 사고와 행태를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상류층의 비극은 ‘시장 논리’에 의해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최종 편집: 2002년 08월 26일 18: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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