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의 대북 비밀지원설을 둘러싼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공방은 지난달 25일 국감에서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가 “김충식 사장에게서 ‘이 돈은 현대상선이 쓴 게 아니므로 갚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진술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산업은행이 2000년 6월7일 현대상선에 지원한 4천억원이 북한에 흘러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현대상선과 산업은행의 자금거래내역 비공개, 금융감독원의 계좌추적 거부로 인해 아직도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도 ‘의혹과 설(設)’이 넘쳐난다. 정책결정과 집행과정의 투명성이 담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제기된 의혹들 역시 명쾌하게 밝혀지지 못한 채 사그라든다는 것이다. 의혹 제기가 정치공세 차원에서 진행되면서 실체 규명이나 사실 확인보다는 주장의 정치적 유불리만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이를 보도하는 언론 역시 정치적 준거집단이 어디냐에 따라 예단과 과장 혹은 축소보도를 일삼고 있다.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독자의 몫이다 일부 언론은 대북 비밀지원설이 제기된 초반부터 이를 기정사실화하거나 이미 드러난 사실을 새로운 사실인 양 보도하며 의혹을 키웠다. 반면 <한겨레>는 9월27일치에서 “4억달러 기업운영에 썼다” “적자눈덩이 대북지원 설득력 없어”라는 제목으로 산업은행 대출금 4900억원을 기업 운영자금으로 사용했다는 현대상선의 해명을 전했다. 10월1일치에서는 “대출금 일부 계열사 일시지원”이란 제목으로 현대상선이 대출금 일부를 계열사 지원에 사용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북 비밀지원설보다는 현대그룹 내부의 자금흐름에 무게를 둔 것이다. 한겨레는 5일치 첫판에서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의 추가 진술에 대해 당시 산업은행 총재이던 이근영 금감위원장의 말을 빌려 “4천억 현대계열사 지원에 썼을 것”이란 제목을 달았다. 2판부터는 “이근영, 4천억 현대계열사 지원했을 것” “엄낙용, 대출 한광옥 실장 지시했다 들어”라는 식으로 대립하는 주장을 양립시켰다. 실상을 당장 규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균형을 잡은 듯하지만 여전히 대북 비밀지원설에는 거리를 두는 태도가 엿보인다. 이는 관련 기사를 취급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의혹이 최초로 제기된 9월26일치 기사는 2면에 2단으로 실렸으나 그 다음날 현대상선의 해명기사는 1면 머릿기사로 다뤘다. 한겨레의 이같은 보도태도는 근거없는 대북 비밀지원설이 가져올 파장에 대한 경계심 때문으로 보인다. 아직 대북 비밀지원설의 분명한 실체를 알 순 없지만, 이 공방은 결과적으로 냉전수구세력의 준동과 이로 인한 남북관계 경색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매우 높다. 한겨레가 대북 비밀지원설과 현대그룹 내부거래설의 차이를 구분하고, 대북 비밀지원설의 실체를 따지는 것은 남북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한겨레의 지향 및 노력에 비춰 당연하다. 대북 비밀지원설과 관련한 일련의 보도에서 한겨레는 시종일관 의혹을 부풀리려는 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현대상선의 해명과 현대그룹의 내부거래설을 규명하는 데 주력했다. 언론으로서 건강한 문제의식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 결과 이 문제를 보도하는 입지를 스스로 좁혔다는 지적을 받을 소지도 남겼다. 이재명/ 참여연대 투명사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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